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덴무 덴노 (문단 편집) === 문화 === '''덴무 천황은 일본 고대의 전통적인 문예·전승을 발굴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외래의 것이 배척된 것은 아니었지만, 덴무 이전과 이후의 여러 천황들과 비교해볼 때, 일본 토착 문화의 발굴과 정돈을 향한 그의 노력은 현저하다. [[야마토]](倭)라는 국호를 '日本'으로 정하고, 군주의 호칭을 '天皇'으로 칭한 것은 덴무가 최초라는 것이 유력하다. 또한 '''덴무 천황은 그 전까지 민간에서 전해지던 습속을 적극적으로 포용해 그것을 국가 단위의 제사로 소급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후술할 신도의 제사를 포함해 후대까지 전통으로 전해진 주요 궁정 의식의 대부분은 덴무 천황에 의해 창시(혹은 집대성)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고세치노마이'(五節舞)는 그 확실한 예로 꼽히며, '니이나메노마쓰리'(新嘗祭)를 국가 제사로 승격시켜 '다이죠사이'(大嘗祭)를 마련한 것도 덴무 천황이었다. 예술적으로도 살펴보면, 덴무 4년([[675년]]) 2월 9일에 기나이와 그 주변 지역에서 노래에 뛰어난 남녀·난쟁이·기인들을 궁정에 모으도록 명령하고, 4월 23일에 그들에게 녹을 주었다. 6년([[677년]])에 처음으로 시•부(詩賦)를 지었다. 14년(685년) 9월 15일에는 뛰어난 노래와 피리 연주를 자손에게 전하도록 명령했고 이듬해 15년([[686년]]) 1월 18일에는 배우와 가인(歌人)들에게 포상을 내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정치적으로는 덴무 10년([[681년]]) 3월 17일에 황태자와 여러 신하들에게 역사책을 편찬하도록 명령했다. 이는 훗날 완성되는 《[[일본서기]]》 편찬 사업의 효시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히다노 아레(稗田阿礼)로 하여금 역대 천황의 계보와 선대로부터 전해지는 구사(舊辭) 등의 기록을 암송하도록 명령했는데, 이것이 오노노 야스마로에 의해 성문화된 것이《[[고사기]]》였다. 모두 천황 사후에야 완성되었으며, 오늘날 현존하는 일본 최고의 사서로 꼽힌다. 한편 천문에도 조예가 깊었던 덴무 천황은 재위 4년([[675년]]) 1월 5일에 일본 최초의 천문관측기구인 점성대(占星臺)를 세우도록 했다. 덴무 4년 4월 17일(서기 675년 5월 19일), 천황은 <[[육식금지령]]>을 내렸는데, 그것은 4월 1일(5월 3일)부터 9월 30일(10월 27일) 동안 어린 물고기를 잡거나 먹지 말고 보호할 것과 다섯 종류의 가축([[소]] · [[말(동물)|말]] · [[개]] · [[원숭이]] · [[닭]])의 고기를 먹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일본은 메이지 유신 당시에 <육식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 제대로 된 육식을 하기가 힘들었다. 자세한 것은 문서 및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blisskim47&logNo=220498873811|링크]] 참조. 율령국가를 목표로 한 정책의 일환으로 덴무 11년([[681년]])에는 기존의 일본 고유 머리 모양이었던 쌍상투를 바꾸도록 명령했다. 이후 일본인들의 머리 모양은 관을 쓰기에 적합한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또한 덴무 12년([[682년]])에는 위계를 나타내기 위해 관모의 색깔을 구별하던 것을 바꾸어, 관모가 아닌 조복의 색깔로 구별하도록 변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